세계유산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지위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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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철강과 조선, 탄광업에 힘입어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통해 일본이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고 “제조업 선두 국가”로 나설 수 있었던 과정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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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괄 등재된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은 주로 규슈 지방 및 야마구치현을 포함한 일본 전국의 8개 현 11개 도시에 펼쳐진 23개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기 지역에는 서양의 전문 기술을 기초로 한 초기 산업혁명 유산이 총 다섯 군데 있습니다.

일괄 등재에 관하여

일괄 등재란 동일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가졌으나 지리적으로 산재한 여러 지역을 한꺼번에 등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를 통해 일본 전역에서 공통되는 가치를 지녔으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을 한꺼번에 등재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하기 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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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지역은 해안 방비 강화의 일환으로 강철 대포 생산에 필요한 제련소인 반사로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은 굴뚝뿐으로 10.5m의 높이에 대부분 안산암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56년 반사로를 잠시 가동했었다는 하기 지역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하기 반사로는 시험 삼아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반사로 유적은 니라야마(시즈오카현)와 하기에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일본의 산업 기술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하기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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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도쿠가와 막부가 군비 및 각 번의 해안선 방어력 강화를 위해 대형 함선 건조 금지를 철폐하자 하기 지역 역시 대형 함선의 건조 의뢰를 받았습니다. 1856년, 하기의 뛰어난 조선공인 오자키 고에몬과 그 동료들이 오바타우라의 에비스가하나에 조선소를 짓기로 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첫 번째 서양식 함선인 “헤이신마루”가 완성됐고, 1860년에는 “고신마루”가 완성됐습니다. “헤이신마루”를 건조하는데 필요한 철은 오이타야마 다타라 제철소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거대한 방파제는 에도 시대 이래 지금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오이타야마 다타라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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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원료 상태의 사철을 석탄의 열로 녹여 철을 생산했던 제철소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 제철 방식에서는 용광로 내의 사철과 석탄에 공기를 더하기 위해 풀무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제철 방식을 “다타라”라고 합니다. 오이타야마 다타라 제철소는 1751년부터 1764년까지, 1812년부터 1822년까지, 1855년부터 1867년까지 총 세 차례 가동되었습니다.

오이타야마 다타라 제철소


하기 조카마치(성하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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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기술 도입 초기에는 각 번을 다스리던 봉건 영주들의 지도 아래 각 지역에서 산업 기술이 개성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모리 데루모토는 하기성을 건축했고, 이에 발맞춰 하기 조카마치(성하도시) 역시 체계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사무라이와 상인의 거주 지역은 엄격하게 구분됐으며, 그 이후 하기는 하기번의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지로서 260년간 번성했습니다.

하기 조카마치(성하도시)


쇼카손주쿠 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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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손주쿠 사숙은 하기 지역에서 군사학을 가르쳤던 요시다 쇼인이 교장을 지낸 사설 학교입니다. 50㎡의 넓이에 1층짜리 소형 목조 건물로 기와 지붕을 얹었고, 다다미 8장(13.2㎡) 넓이의 강의실과 10.5장(16.5㎡) 넓이의 대기실로 나뉘어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1856년에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시작했고, 1857년에 현존하는 학교로 옮겼습니다.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도 이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그 외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일본의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한 많은 사람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쇼카손주쿠 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