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1603~1867), 사사나미이치는 하기에서 미타지리로 향하는 하기오칸의 두 번째 휴식처였습니다. 주고쿠 산지를 넘어 하기와 세토 내해의 항구 도시 미타지리(지금의 호후시)를 연결하는 가도였던 하기오칸은 1600년대 초엽의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 모리 가문이 하기와 번내 각 지역의 왕래,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물러야 하는 산킨코타이의 이동 수단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유력한 다이묘였던 모리 데루모토(1553~1625)는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군대와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영지를 크게 잃고 거처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히로시마 성에서 나와 세토우치와는 반대편의 시골이었던 하기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데루모토와 가신들은 사사나미이치에 들러 조쇼안이라는 절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사사나미이치가 마음에 들었던 데루모토는 조쇼안을 자신들이 관리하며 산킨코타이를 위한 이동 중에 휴식을 취하거나 숙박할 수 있도록 비용을 들여 찻집으로 개조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하기에 입성한 지 2년 후인 1606년, 데루모토는 하기오칸의 길을 따라 마치야(상가주택) 62채를 건설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때 지어진 주택들은 가미노초, 나카노초, 구도시까지 세 지구로 나뉘었습니다. 세 지구는 각각 농업을 바탕으로 가미노초에서는 여행객에게 숙박을 제공하고 나카노초에서는 주조, 기름 가게, 초간장 가게, 두부 가게, 쌀 가게, 주물 가게, 대장간 등의 상공업을, 구도시는 하역을 위한 말을 제공하는 등 각 지구마다 맡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1865년, 사사나미이치는 조슈번내에서 각 무사 세력들이 대립하며 충돌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사사나미의 전투’로 불리는 전투에서는 12채의 가옥이 불탔고 5명의 무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사나미이치는 이 사건을 제외하고는 1600년대부터 변함없이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가옥들은 19세기에 지어졌으며, 2010년에 문화청의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사나미이치에 있는 건물 대부분은 문화청의 지원을 받아 복원되었습니다. 고바야시 가문 옛 주택은 2015년부터 2017년에 걸쳐 1억 엔을 들여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본래 료칸으로 사용했던 통풍이 잘 되는 2층 건물은 투숙객들이 객실을 드나들 때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2개의 계단을 설치했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지붕의 용마루와 평행한 면을 정면으로 해서 현관을 배치하는 ‘히라이리즈쿠리’ 양식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사사나미이치에서 주목할 만한 건축물로 하야시야 료칸, 술집이었던 오쓰쇼텐, 사사키 가문, 미우라 가문, 오노 가문의 주택 등이 있습니다. 오노 가문의 경우, 이전 건물은 사사나미의 전투로 소실되면서 1860년대 후반에 재건되었습니다. 전형적인 농가 구조로 본래 네 방향으로 경사가 진 지붕면인 요세무네즈쿠리(우진각 지붕)의 가야부키 지붕(억새 지붕)이었는데, 쇼와 시대(1926~1989)에 들어 기와 지붕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한국어 해설문은 관광청의 2024년도 ‘지역 관광자원의 다국어 해설 정비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어 원어민의 편집 및 번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기본 정보
주소 | 사사나미, 하기, 야마구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