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반사로

萩反射炉

서양식 대포 주조를 목표로 건설된 금속 용해로

19세기 중엽에 들어, 도쿠가와 막부와 막부 말기에 큰 세력으로 성장한 사쓰마번, 조슈번 등의 무사들은 일본의 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서양의 기술 중에서도 특히 군사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 제국들의 고래잡이가 태평양까지 확대되면서 중국 청나라(1636~1912)가 제1차 아편 전쟁(1840~1842)에서 영국에 패배했고, 1853년에는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1794~1858)이 이끄는 해군 원정대가 우라가 만(가나가와현)으로 내항하여 일본 정부에게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조슈번의 모리 가문은 탄소 함유량이 낮은 연철을 제조할 수 있는 용광로 개발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연철은 근대적인 대포와 군함의 재료이자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규슈의 사가번에서는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받은 도면을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반사로를 건설했습니다. 모리 가문은 반사로의 기술을 습득하고자 1855년에 4명의 가신을 사가에 파견했지만, 사가번은 제조 기술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신 중 한 명이 간신히 설계도의 대략적인 그림을 들고 돌아오긴 했지만, 상세한 제작 방법이나 조작 방법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조슈번에서는 이듬해인 1856년에 반사로를 완성시켰지만,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재료도 목탄과 선철(탄소 함유량이 비교적 낮은 철)이었기 때문에, 연철 제조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연철을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면서 결국 용광로는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사가번에서는 네덜란드 설계도의 완전한 번역본을 손에 넣게 되면서, 영지 내 탄광에서 석탄을 조달하고 외국 선박에서 고품질의 철제 밸러스트(배의 무게 안정성을 조절하기 위한 추)를 몰래 조달하는 등 연철 생산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에서 채굴된 안산암을 사용하여 상부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하기 반사로의 두 굴뚝은 하기 지역에서 산업 근대화 초기의 ‘시행착오’ 정신을 오늘날에 전하는 기념비적인 존재입니다.

2015년, 하기 반사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및 탄광’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 한국어 해설문은 관광청의 2024년도 ‘지역 관광자원의 다국어 해설 정비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어 원어민의 편집 및 번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기본 정보

요금 무료
교통 하기 준칸 마루 버스 동부 노선 하기 반사로 정류장에서 도보 5분
주소 하기 진토 4897-7
영업 시간 연중무휴
휴무일 휴일 없음
주차 공간 무료 주차장
웹사이트 https://www.hagishi.com/ko/world-heri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