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드문, 불교와 신도가 같은 장소에 공존하는 신앙형태(신불습합)의 절
엔세이지 절은 훗날 전국 시대(1467~1568)에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오우치 가문의 기간지(祈願寺, 가문에서 기원을 드리기 위해 세운 절)로서 1254년에 야마구치시에 창건되었습니다. 오우치 가문이 모리 가문에 의해 혼슈 서부 지역의 권력을 잃게 된 후, 모리 가문은 엔세이지 절을 자신들의 기간지로 삼았습니다. 1604년, 하기로 거처를 옮긴 모리 가문에 의해 하기 성 인근으로 이축된 엔세이지 절은 19세기 중엽에 ‘야에 하기 명소 도화’에도 등장하는 등, 이 지역의 신사와 절 중에서도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엔세이지 절은 진언종의 사원이나, 경내에는 신도(神道)의 신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불교와 신도가 같은 장소에 공존하는 신앙 형태(신불습합)는 1868년, 불교와 신도가 국가에 의해 강제로 분리된 메이지 시대(1868~1912) 이전에는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엔세이지 절의 정면에 위치한 도리이도 두 종교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곤피라샤의 샤덴(신사의 건물) 처마에는 십이간지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거대한 덴구(일본 전설에서 등장하는 요괴)의 가면이 걸려 있습니다. 1838년에 제작된 이 덴구의 가면에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크게 공헌한 다카스기 신사쿠(1893~1867)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사쿠는 어릴 적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 이처럼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있는 가면 앞에 끌려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60년대에 도쿠가와 막부의 타도를 외치는 무사들의 리더로 활약했습니다. 신사쿠는 1862년 12월 12일에 발생한 에도 영국 공사관의 화공(火攻) 사건에 관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민과 무사의 혼성 부대인 기병대를 결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 28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샤덴에 있는 ‘곤피라 다이곤겐 오카가미’는 1822년에 제작된 커다란 관상용 거울(지름 1.25m)로, 뒷면은 칠보 공예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한 때 절에서 도난당하며 소재지를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 도쿄의 옥션에 출품되면서 고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샤덴 옆에 있는 목마(신메, 신사에 바친 말)는 1820년에 야스나가 사다에몬(생몰년 미상)이 제작한 것입니다. 경내에는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큰 3m 높이의 석등이 있으며, 용과 중국 고전의 한 장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석등은 지진에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도록 5개의 돌로 지탱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엔세이지 절을 곧잘 찾아온 사람 중에는 주지의 사촌 아들인 하야시 리스케(1841~1909)가 있었습니다. 리스케는 11살 때부터 절의 허드렛일을 하며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며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당시 통학에 사용했던 나무 배낭은 귀중한 공예품으로 절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04년에 방영한 NHK 대하 드라마 ‘신센구미!’, TV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 석등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에피소드 등에도 엔세이지 절이 등장했습니다.
(이 한국어 해설문은 관광청의 2024년도 ‘지역 관광자원의 다국어 해설 정비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어 원어민의 편집 및 번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기본 정보
요금 | 200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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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 하기 중앙공원에서 서쪽으로 도보 3분 |
전화번호 | 0838-22-3031 |
주소 | 야마구치현 하기시 미나미후루하기마치 6 |
영업 시간 |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매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