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다카요시(1833~1877) 옛 주택

木戸孝允旧宅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세 명의 주요 인사 중 한 사람

메이지 시대(1868~1912) 초기의 정치가이자 메이지 유신의 ‘삼걸(三傑)’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옛 주택은 하기 성 방면으로 성하도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와 교차하는 좁은 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층 집을 소유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던 집안이었지만, 건물의 2층 부분은 아랫쪽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무사[특히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를 내려다보는 행위를 무례하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2층 건물을 금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도 다카요시 옛 주택은 도로에서 보면 소박한 단층 구조의 마치야(상가주택)처럼 보입니다.

모리 가문의 시의(侍醫) 집안에서 와다 고고로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다카요시는 7세 때 옆집인 가쓰라 가문에 입양되면서 가쓰라 고고로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지성을 자랑했던 다카요시는 1849년에 양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요시다 쇼인(1830~1859)이 군사학을 가르치는 번교(무사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학교) ‘메이린칸’에 입학했습니다. 다카요시는 그곳에서 쇼인이 주창한 ‘서양화(西洋化)’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외적을 척결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 공감하면서 면학에 힘썼습니다. 재학 중에는 막부와의 협력과는 상관없이 일본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56년에 조슈번 최초의 서양식 군함 건조를 진언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다카요시가 반막부 세력의 일원이 되면서 1864년에는 신센구미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신센구미란,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에 대한 폭동을 진압하고자 조직한 특수 경찰 조직을 말합니다. 다카요시의 애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게이샤 이쿠마쓰(1844~1887)는 신센구미가 다카요시를 노리고 찾아온 것을 목격하면서 그에게 경고했다고 합니다. 다카요시는 1868년에 막부가 붕괴된 후, 메이지 신정부의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면서 1871년 12월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른 정치가 및 학자들과 함께 미국과 유럽의 산업과 사회를 시찰하는 항해에 나섰습니다. 이 시찰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운 것에 영향을 받은 다카요시는 1873년에 일본에 귀국하면서 정치 개혁 심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다카요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주택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800년대 후반의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실내에는 다카요시의 생애에 관한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모던한 서양복 차림의 다카요시의 모습과 뒷면에는 ‘Maul & Co., Photographers and Miniature Painters of 187a Piccadilly and 62 Cheapside’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초상 사진, 다카요시가 유년기에 쓴 서예 작품 등이 있는데 그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에 걸려 있는 ‘今日(오늘)’라고 적힌 작품입니다. 다카요시가 7살 무렵에 쓴 이 작품에는 당시 서예의 스승이 ‘매우 훌륭하다’는 뜻으로 쓴 글자가 붉은 색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 한국어 해설문은 관광청의 2024년도 ‘지역 관광자원의 다국어 해설 정비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어 원어민의 편집 및 번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기본 정보

요금 100엔
교통 하기중앙공원 서쪽으로 도보 5분
주소 하기 고후쿠마치 2-37
영업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매일)